대덕에서 추억하다
언젠가 초여름이었어요. 담양의 작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 찻집을 겸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다가 문득 창문을 통해 보이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을 보다는 마을를 향해 길게 나 있는 비포장 흙 길이었어요. 소달구지 지나간 흔적이 아직 남아있고 소달구지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질경이가 강인하게 생명을 지키고 있는 시골길이요.
문득 생각이 나네요. 간혹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을 두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 올 때. 그럴 때마다 걸었었다는. 걷곤 또 걷고...참 이상하죠? 해결은 커녕 아무런 진전도 없는데 마음이 편해졌어요. 문제가 마음에서 멀어져 있는 거에요
‘걸으면 골치 아픈 문제들도 풀린다.’ 최근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에요. 저에게는 맞는 말이에요. 길게 난 골목길을 걷거나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낯선 길을 걷는 것도 좋아요.
그 날 창밖으로 보이는 시골길에 묘하게 끌린 나머지 함께 차를 마시던 일행들을 꼬드겼습니다. 햇빛이 너무 세다며 몸을 빼는 일행에게 비타민D를 들먹이며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그늘이 없어 햇빛이 따갑다고 투덜거리던 일행도 금새 싱그러운 초록의 냄새와 흙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깊이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통통거리는 발걸음으로 거의 마을까지 다 왔습니다.
유혹의 끝은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후, 두, 두, 후두두둑...그만 비를 만나고 말았던 거에요. 어찌해 볼 새도 없이 아니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없지요.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뛰는 것이었어요. 마을의 정자를 향해 뛰는 동안 쫄딱 젖고 말았어요.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물꽃이 되어 웃었어요. 웃고 말았어요. 그 날 입었던 흰 바지와 운동화는 흙물이 베었고요.
몇 번의 봄이 지났을까요? 흙 빛이 베인 흰 바지도 운동화도 기억이 희미해졌어요. J. 오늘 무심결에 그 길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아, 오늘은 차로 갔습니다. 담양 대덕의 외진 길.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어요.
나뭇잎과 풀잎은 꾹 누르면 연초록 물감이 베어 나올 것 같아요. 길섶에는 키 낮은 풀잎들이 어쩌다 부는 바람에 초록 물결을 이루고 길 양쪽으로 논과 밭을 사이에 두고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있었어요.
언제 왔는지 바짝 따라붙은 버스가 사납게 크락션을 눌렀어요. 어느 새 버스도 다니고 있었어요. 좁은 길을 에돌아 가던 버스는 예상했던 대로 얼마가지 않아 차를 돌려서 멈췄습니다. 종점 이었던 거에요.
버스에서는 흰색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이 내렸습니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로의 옆구리에 툭,툭, 훅을 날리는가 하면 무엇이 좋은지 웃어 젖히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나란 나란하게 걸어갔습니다.
J. 부럽죠?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들이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오롯이 남은 나의 벗. 서로 사는 것이 바빠 멀어져 있지만 마음 속에 굳건히 살아있는 고마운 나의 벗. 추억 속에서 만은 완전한 나의 소중한 벗.
푸르디 푸른 배경도 좋지만 무엇보다 서로 어깨를 걸고 팔짱을 끼면서 시간을 함께 겪어 낸 벗이 곁에 없었다면 미완성 추억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마음 속 꽉 막힘과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온갖 찌꺼기 그리고 비겁함을 아는 유일한 벗 아니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으로도 충분히 이야기 거리가 되는 그런 벗이 있어야만 추억은 완전 해지지 않을지요?
그 남학생들이 버스에서 혼자만 내렸다면 얼마나 쓸쓸해 보였을까요? 다행히 혼자가 아니어서 또 한 명이 있어서 잠시지만 따뜻한 그림을 그리며 생각에 젖어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함께 했던 벗들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고요.
야산 끝자락엔 눈이 부시게 붉던 철쭉꽃이 젖혀지고 순백의 찔레꽃이 한창입니다. 찔레는 짙어지는 초록 속에 점점이 하얀 꽃 수를 놓았어요. 세상의 허망한 꿈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마디 마디 끊어서 우는 새소리와 정겹게 어울려 하얀 꽃 냄새를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J. 찔레꽃이 피면 봄은 끝인거죠? 봄의 시작도 끝도 전할 수 있어 즐거워요.
이만 안녕.
'MY STORY-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봄 그리움 (0) | 2017.04.19 |
|---|---|
| 명옥헌 (0) | 2017.01.11 |
| 그리움 (0) | 2017.01.11 |
| 약속 (0) | 2017.01.11 |
| 끝내 사랑은 이별입니다. (0) | 2017.01.11 |